
[TV리포트=강해인 기자] AI 판사의 힘을 느낄 수 있는 영화가 관객과 만났다.
악독한 범죄에 관한 뉴스를 접할 때면 갖게 되는 의문이 있다. ‘판결이 왜 이렇게 늦지?’라는 생각에 답답함을 느끼고는 한다. 이 시간을 획기적으로 줄이고 범죄자들을 빠르게 처벌할 수 있다면, 우리 사회는 어떻게 변하게 될까. ‘노 머시: 90분'(이하 ‘노 머시’)는 이를 구현한 사회의 모습을 스크린에 담았다.
‘노 머시’는 아내를 죽였다는 혐의를 받은 레이븐(크리스 프랫 분)이 AI 판사 매독스(레베카 퍼거슨 분)에게 재판을 받는 이야기다. AI 판사에게 배정된 용의자는 무죄를 입증하지 못하면 90분 뒤에 목숨을 잃는다. 레이븐은 현장의 정보와 아내의 죽기 전 데이터를 끌어모아 무죄를 입증하고, 진짜 범인을 찾아야만 한다.
챗 GPT가 대중화되는 시점부터 AI의 강력함을 체험한 이들이 부쩍 늘었다. AI는 데이터 수집, 요악, 가공 등의 작업에 소요되는 시간을 대폭 단축시켰다.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내는 일도 척척 해내고 있다. 덕분에 다양한 분야에 활용되며 세상을 빠르게 변화시키고 있다. 물론, 우려도 쏟아졌다. 미래엔 많은 직업이 AI로 대체될 거란 이야기도 들린다. ‘노 머시’는 법을 집행하는 판사를 AI로 대체한 미래를 제시한다.

인간적인 판단이 개입되지 않고, 냉철한 판단으로 법을 집행하는 AI 판사는 이상적인 존재처럼 보인다. 감정과 인정에 휘둘리지 않아 허술하지도 과하지도 않다. 돈과 권력에 흔들리고 부패할 일도 없다. 무엇보다 증거를 취합하고 해석하는 시간은 인간보다 몇 배는 빠르다. ‘노 머시’는 이를 인정하고, 영화 속 도시의 범죄율이 AI 판사의 도입 후 대폭 줄었다며 긍정한다.
여기서 ‘노 머시’는 억울한 피해자를 내세워 AI가 내린 판결의 결함과 위험성을 고민하게 한다. 흥미로운 건 레이븐이 AI 판사를 도입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인물이라는 데 있다. 맹신했던 AI에게 쩔쩔매는 레이븐의 모습은 역설적이다. 그가 추구했던 신속한 법의 집행 속에 무고한 피해자가 발생했을 수도 있다는 걸 직접 체험하게 된다. 영화 속 ‘증명하지 못하면 죽음’이라는 설정이 다소 극단적이지만, 덕분에 AI 판사의 위험성을 더 돋보이게 할 수 있었다.
‘노 머시’의 AI 판사 매독스는 제시된 데이터 만을 읽을 수 있다. 행간에 감춰진 음모를 추측하는 건 알고리즘에 어긋나 시도할 수 없다. 때문에 데이터로 기록되지 않은 정보는 사건과 연결하지 못하고, 기록 자체에 의문을 던지지도 않는다. 즉, 표면적 기록을 조작할 수 있다면 이 AI 판사는 잘못된 판결을 내릴 수 있다. 레이븐 역시 매독스가 간과한 정보를 찾아 탈출구를 찾는다.

그러나 이 영화는 AI를 부정적인 시선으로만 담지 않는다. 매독스는 레이븐의 수사를 적극적으로 지원하고, 현실적인 방안도 추천한다. 무죄 입증이 불가능해 보여 자포자기할 때면, 아직 시간이 있으니 최선을 다하라며 독려하기도 한다. 매독스는 중립적인 입장에서 할 일을 할 뿐이다. 처음에는 극의 안타고니스트 위치에 있지만, 조금씩 레이븐과 공조하는 역으로 위치가 변해가는 것도 볼 수 있다.
후반부 매독스는 기존 알고리즘을 거부하고, 독자적인 행동을 한다. 이런 점을 볼 때 ‘노 머시’는 매독스를 경계하면서도 AI의 유연함과 가능성을 신뢰하는 듯하다. 그리고 인간의 의도와 욕망이 데이터에 개입할 때 일어날 수 있는 비극을 조명하며, 인간의 불완전함을 강조하기도 한다. 초반부엔 AI의 전능함을 전시하던 ‘노 머시’는 매독스의 변화와 함께 AI와 인간의 영역에 관한 묵직한 질문을 던지는 데까지 나아간다.
‘노 머시’는 한정된 공간을 영리하게 확장하며 볼거리를 풍성하게 했다.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 ‘쥬라기 월드’에서 활약한 크리스 프랫은 이번 영화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손이 묶인 채 의자 위에서 보낸다. 그러나 현장 및 용의자 주변에 있는 CCTV, 카메라, 드론 등에서 얻은 영상 덕에 누구보다 많은 걸 볼 수 있다.

더 재밌는 건 관객이 레이븐과 유사한 위치에서 재판을 체험하게 된다는 데 있다. 손이 묶여 의자에 앉아 있는 레이븐처럼, 극장에 온 관객도 그 자리에서 벗어나지 않고 매독스와 마주하게 돼 몰입감이 높다. 그리고 영화의 러닝타임이 100분인데, 레이븐이 재판을 받는 90분을 거의 실시간으로 온전히 다 느낄 수 있다. ‘노 머시’는 관객이 이 데드라인을 몸소 체험할 수 있게 함으로써 긴장감을 대폭 높였다.
이 영화가 디지털 디바이스의 영상으로 화면을 구성하는 방법은 노트북 속 화면으로만 이야기를 전개했던 ‘서치’를 떠올리게 한다. ‘노 머시’의 연출을 맡은 티무르 베크맘베토브는 ‘서치’의 제작에 참여했었고, 이 작품에서 AI라는 테크놀로지를 통해 ‘서치’의 형식과 이미지를 더 확장했다. 이번 영화에서 비중이 가장 크고, 출연료도 높았을 크리스 프랫과 레베카 퍼거슨의 동선을 최소화했다는 점도 인상적이다. 효율적인 촬영을 통해 제작에 큰 이점을 가져갔을 것으로 보인다.
‘노 머시’는 AI가 불러올 수 있는 미래를 먼저 보고, 사유하고 싶은 관객에게 추천할 수 있는 세련된 스릴러 영화다.
강해인 기자 [email protected] / 사진= 소니픽처스코리아